2008년 10월 7일 화요일

무스탕 - 야생마의 역사

무스탕이라는 말은 이제 젊은이들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숙해진 단어이다.

무스탕(머스탱)은 이차 세계 대전 때 단 반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탄생한 미군의 걸작 전투기 이름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을 약간 두고 1964년 포드사가 만든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 이름으로서 다시 세간에 그 이름을 날렸다.
포드의 무스탕은 일 년 반 만에 그때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 되었던
백 만대 판매의 대기록을 세워서 자동차 역사에 큰 기념비를 남겼다.
그때의 성공은 무스탕이라는 이름에 엄청난 브랜드 파워를 얹어 줘
남성적이고 활동적인 각 상품 각 분야에 이 이름이 활용되고 있다.

무스탕은 미국 서부에 사는 야생마를 뜻한다.
무스탕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멕시코 식 스페인어인
mestenco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 할 듯하다..


들말이라는뜻의 이 이름이 야생마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스탕들의
조상이 스페인에서 왔었고 이들이 살던 지역인 텍사스와 켈리포니아
사이가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근대의 말은 멕시코를 점령한 코르테즈에
의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서 인도 제도에 1493년, 그리고 미 대륙에는 1519년이 말들이
처음 발을 내 딘 해이다.

북미 대륙에 유입된 대부분의 말들은 초기 스페인인들이 터를
잡고 있던 멕시코를 통해서 북쪽으로 올라 온 것들이다.

그 스페인 말들은 안다루시아 지방 말이나 무어 족들이 남기고 간
아랍 말 종류등이다.

이들 말들 중에 아라비아 말은 말 종류 중에 맵시가 뛰어난 말로
유명한 명화 벤허의 마차 경기에서 벤허의 전차를 끌던 네 마리의 말이다.

그리고 유명한 스페인의 명작 “라만차의 사나이”의 동 키호테가 타던
말인 로시난테도 이런 말 종류였을 것이다.

남북미 아메리카 대륙에 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라스카 북극권 동토 지대 지하에서 얼어있었던 25,000년 전 말의
온전한 사체가 발견되었는데 근대의 말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들 원주민 말들은 인간들이 아시아로부터 베링 해 자리에 있었던
좁은 육지다리를 거쳐 미 대륙에 유입될 무렵인 약 만 년 전에
멸종되고 말았다.

멸종 이유가 추운 기후탓인가 인간들의 사냥 탓인가는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의 말들은 도주해서 야생으로 들어가
미국 무스탕의 원조가 되었다.

무스탕의 확산에 그들의 도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디언들의 초기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북미 인디언들은 말의 도래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 대륙에 말이 살았었기 때문이었는지 넒은 북미 대륙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인디안 들은 공통적으로 "풀들은 기억하리라”라는 줄거리 전개로
말의 도래를 예언하는 신기한 전설이나 신화가 많이 전해 내려 왔었다.

북미 인디언들이 말에 보인 관심은 남미의 인디언들이 말에 보인 관심에
비하면 매우 이색적이다.

남미 잉카 인디언들은 자기 땅을 정복하러온 스페인 불량배 피사로의
부대에 맞섰다.

그들 인디언들은 말도 없었고 또 고전 싸움의 주요 도구인 활도 없는
형편이었다.
인디언 전사들은 스페인 인 들이 타고 온 말을 멀리서 보고 사람과
말이 하나로 붙어있는 괴물로 보았다.

이들이 공포에 휩싸여 우왕좌왕 할 때 마상의 스페인인들은
돌격하며 화살을 날렸다.
인디언들은 날아오는 화살조차 처음 보는 물건이라서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꽂인 뒤에야 비명을 질렀다는 이야기인데
남미 인디언들이 말을 받아들인 정도는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일대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제외하고 북미 인디언들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이었다.

북미 인디언들은 별로 반갑지 않게 자기 고장을 차지한 스페인인들로부터
말을 훔치거나 물물 교환으로 말을 손에 넣기 시작해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원체가 북미 대륙 서부란 넓디넓은 평야지대 인지라 인디언과
말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기 영역들을 찾아 나갔다.

승마는 물론이고 화물 운반, 전투 그리고 사냥 등의 분야에서
대 활약을 한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이 활약했던 중요 분야의 하나가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던 버팔로(들소) 사냥이었다.

빠른 주력을 가진 말들로 버팔로의 떼를 추적하고 포위하여
대량으로 노획할 수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백인들과의 전투였다.
두 용도 다 이미 영화에 자주 소개되어 한국인들에게도
낯익은 모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이 보유하는 말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말이 미 대륙에 소개 된지 백년이 조금 넘어 1680년 미 서부
푸에브로 인디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축출하고 자기들의
자치 국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십년이나 유지했었다.

푸에블로는 1968년 동해상에서 북한에 납치되었던
미 해군 정보 수집함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인데
이 인디언의 부족 이름을 딴 것이다.


그때 이들이 동원한 기병의 숫자가 7,8000기였다고 하니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스페인인들이 불과 수백 명의 병력으로 잉카라던가 아즈텍을 점령하던
시절에 비하면 인디언들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 된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 숫자가 늘어가면서 평원을 떠도는 무스탕의 숫자도
늘어나는 현상도 벌어졌다.


원래 인디언들은 말들을 가두어 두는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도 수시로 이동하면서 살던 터이라 말의 관리가 느슨했었다.
더해서 서쪽으로 몰려오는 백인 서부 개척민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래저래 야생으로 들어오는 말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스탕이 늘어나자 인디언들은 야생마를 잡아서 훈련시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한걸음 나아가 인디언들은 우수한 말들을 서로 교배시켜 우수한
품질의 품종을 만드는 높은 경지로까지 고난도의 육마 기술이
일부 인디언 부족 사이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의 육성에 우수했던 족속들은 호전적인 코만치 족이나 쇼쇼니 족
그리고 지금은 존재가 미미해진 네즈 퍼스(nez perce)족이다.

특히 후자의 종족은 미국 최초의 마종인 아파루사(Appaloosa)종을
만들어냈다. 아래 사진이 아파루사 말이다.
이 말은 표범 같은 개성 있는 무늬를 가진 말이다.
말의 품성을 보면 백인들보다도 앞선 솜씨였다.


인디언들의 뒤를 따라서 그 후에 백인들도 무스탕을 모체삼아
대 여섯 종의 말 품종들,모르간이니 테네시 워커니 하는
신품종의 말을 만들어냈다.


1800년대가 되자 무스탕의 숫자는 훨씬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말 목장은 제주도 말들처럼 방목을 했는데
말들이 도주하기도 쉬웠고 일이 생겨서 말 먹이기가 수월치 없으면
그냥 야생으로 놓아주기도 했다.

이 현상은 목장 근처의 풀들이 말라 붙는 겨울철에 많았다.
말들이 알아서 멀리까지 가서 먹이를 해결하라고 풀어주는
게으른 목장주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놓아주고 다시 봄이 되면 목장 말이 겨울동안 사귀었던
무스탕 무리들을 데리고 원래의 목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으므로
이를 의도적으로 하는 목장주들도 있었다.
멋도 모르고 신참을 따라 왔던 다른 무스탕은 물론 목장주가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스탕은 하루에 최대 80키로까지 기동한다.
아무리 날씨가 춥거나 여건이 안 좋아도
자신들의 먹을거리는 어찌 됐건 찾아내서 생존을 했기 때문에
꿩 먹고 알 먹는 머리 쓰기였을 것이다.

이런 방목 형태는 무스탕의 숫자를 대폭으로 늘렸다.
이런 잡다한 종류의 말들이 야생마에게 합류하자 원래 스페인 말 종류였던
야생마의 혈통도 잡다하게 혼혈되어 원래의 모습이 변해갔다.

사실 남북 전쟁이 지나고 미국은 서부 개척에 국력을 쏟았는데 서부 인디언들의
저항과 수난이 시작되기 시작 했었다.

인디언들은 크레이지 호스니 시팅 불이니 하는 인디언 추장의 지도 아래 안장도
시원치 않은 말을 타고 백인들에게 저항을 했다.

몽골의 기병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서부 개척사는 인디언 기병들의 전쟁사였다.

커스터의 7기병대가 전멸당한 유명한 리틀 빅혼의 전투는 소수의
백인 기병대와 그 스무 배가 넘는 인디언 기병대와의 전투였었다.

서부 인디언 토벌에 동원된 기병들은 인디언들의 탄 무스탕 말들이
자신들이 탄 말보다 지구력이나 스피드에서 훨씬 앞서는 것을 발견하고
놀랬다.

그래서 인디언 토벌의 핵심은 무스탕 멸살이라 생각해서
엉뚱하게 토벌지역의 무스탕들을 포획하기도 했었지만
크게 성과를 보지는 못했었다.

말이 아무리 좋아도 무기가 시원치 않은 인디언들은 저항의 한계를 보였다.
인디언 부족들이 토벌되어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하나씩 끌려 갈 때 이들 부족은
그들이 사랑하는 말을 평원에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무스탕의 식구 수를 늘려 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세기말 미 서 전쟁과 보어전쟁으로 군마의 수요가 늘어나자
말 값이 매우 좋아졌다.
무스탕들은 포획하여 파는 상업적인 포획자들이 늘어
무스탕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20세기경 미 서부에서
황야를 질주하며 마음대로 살던 무스탕들이
거의 이백 만 마리 가량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급속도 서부가 개발되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무스탕들의 서식지도 좁아 들기 시작했다.
개발의 결과로 큰 대형 목장이 계속 늘어 난 것은 무스탕의
서식 환경을 엄청나게 압박하는 것이었다.
교통이 좋아진 이 시대 말들을 놓아주고 뭐고 하는
임의 방목도 형태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26년이 되자 무스탕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애완용 동물 식품( 펫 푸드)시장이 커지자 무스탕들의
생명은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무스탕을 만들어서 펫 푸드 메이커에 파는 직업 사냥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사용하던 사냥 수단인 비행기와 자동차는
무스탕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위협이 되었다.


1971년 미 의회는 무스탕 보호를 위한 법을 통과 시킨 뒤 무스탕들은
잠시 반짝 번식 하는가 했으나 옛날의 영화는 찾지 결코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무스탕들이 남아 있는 숫자는 불과 25,000마리 수준으로
전성기에 비하면 대폭 줄어 든 셈이다.

오늘날 위 숫자의 절반 정도는 네바다 주에 살고 있고 나머지는
오레건 주와 몬타나 주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런 오랜 과정과 곤란을 겪으며 원래 무스탕이었던 말들의 혈통인 스페인 말의
수요는 다 사라졌다고 생각이 추측이 되었는데 아주 외진 곳에 살던
몇몇 무스탕 떼들의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놀랍게도 원래의 무스탕 원조인
스페인 말들의 유전인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400년도 더 된 종을 보존해온 그들의 독립된 역사가 새삼 놀랄 만하다.


무스탕은 이제 동물세계에서 그 위치가 많이 축소되어가지만
그 기다란 말갈기를 바람에 휘날리며 초원을 질주하던 야성적이고 힘센
모습은 이 산업화 시기에 좀체 보기 드물게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 이미지였다.

1971년 미국 의회는 무스탕 보호의 법안을 통과 시키며 이런 결의안을
통과 시켰었다.

“ 무스탕은 서부의 역사적이고 개척자적인 정신의 심벌로서 앞으로도
미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다양성에 기여 할 것이다”


위의 결의안 이상 더 현대 사회에서의 무스탕의 의미를 표현 하기는 힘들다.

인간의 현대 정신세계에서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스탕의 이미지가
갖는 가치가 그들이 먼 옛날 황야를 달리던 시절보다 수 십 배 크다는 말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댓글 1개:

다다익선 :

요즘 현대엔 주로 에미쉬족들이 마차를 끄는 용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