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7일 화요일

멸종 금강 종어 돌아오다

한국 민물고기 중에 너무 특이해서 나의 관심을 끌던 물고기가
몇 증류 있었다.
1961년 한강 다리 아래서 낚시꾼에 의해서 잡힌 어린 아이만 했던
철갑상어와 개마고원의 맑은 계류에만 산다는 크고 맛좋은 자치--

그러나 역시 제일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금강에 살았던 종어였다.
이고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배를 타고 오르내리던 금강에 살다가 멸종했다는
그 민물고기에 대해서 아는 그 지역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먼저 그 멸종 민물고기에 대해서 설명부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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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목 동자개과의 민물고기. 전체 길이 30∼100㎝. 몸은 길고 몸통은
옆으로 납작하며, 몸의 높이는 등지느러미의 기점에서 가장 높다.
머리는 위아래로 납작하고 머리의 배쪽은 편평하며 주둥이는 나와 있다.
입은 주둥이의 밑에 있고 눈은 작으며 머리의 옆면 중앙보다 앞쪽에 있다.
아래턱은 위턱보다 짧다. 옆줄은 완전하고 몸의 옆면 중앙보다 약간 위를 직선으로 달린다.
가슴지느러미가시의 바깥쪽에는 톱니가 없고 매끄럽지만 안쪽에는 10여 개의 톱니가 있으며,
등지느러미살은 7개이고 뒷지느러미살은 14∼18개이다.
등쪽은 암황갈색이고 배쪽은 담백색이다.
각 지느러미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흑갈색이다.
큰 강 하류의 물이 탁하고 바닥에 모래와 진흙이
깔려 있는 곳에서 살며 주로 낮에 활동한다. 한국·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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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물고기는 너무나 맛이 좋아서 상감께 진상했었다는 전설을 달고 있다.
그 맛이 고기중의 으뜸이라서 고기 앞에
으뜸을 뜻하는 종(宗) 짜가 붙어서 종어라 불리웠다는 배경에서부터
나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나는 종어를 우리나라 수산학의 태두 정문기 박사님이 쓴
어류 박물지라는 책에서 처음 만났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이 책의 초판일이 60년대였다.

책은 종어가 금강 중 하류 지역 특이 부여군에서 많이 났으며
이제는 거의 멸종상태라고 했다.

책에 실린 종어 사진을 보니 살아있는 실물이 아니라
말린 것이어서
실물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야 그것이 박제로 만든 종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도 박제로 실물을 대신 할 만큼 종어는 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메기와 명태를 합쳐놓은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듯 했지만
박제가 된 종어의 모습으로는 종어의 실제 모습을 추측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내가 종어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종어가 상감께 진상하던
귀한 민물고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정 문기 박사님 책에는 이 종어가 금강 줄기에서도 주로 은진이나
임천이라는 곳에서 많이 잡혔다고 했다.

궁중에서도 맛 좋은 종어는 잘 알았고 이를 상감의 수랏상에
자주 올렸다.
임천은 지금은 부여군에 속한 한 개 면이지만 옛날에는
현감이 다스리던 제법 큰 고을이었다.

임천 현감은 부지런히 종어를 궁중에 진상했고 이 과정에서 인맥도
쌓아 현감 임기가 끝나면 서울로 영전해 갔다고 했다.

그래서 종어에 현감 고기라는 별칭도 붙어있다.

정 문기 박사님의 글을 읽고 인상 깊게 종어를 기억하게 된 나는
그 뒤 항상 종어의 정보에 신경을 썼었다.
언제인가 그러니까 금강 하구에 하구 둑이 설치되기 전 강경의
모 음식점에 간 일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서있는 금강 강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그 집은
웅어회와 복찜을 잘했다.

인심 좋게 생긴 아주머니는 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 음식점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내려온 역사가 몇 십 년은 된 오래된 집이었다.
메뉴가 주로 강에서 나는 물고기를 가지고 만든 것들이었다.
생각해봐도 종어를 잘 아실만한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종어에 대해서 물어 봤더니 기대 밖으로
그 아주머니는 잘 모르고 계셨다.


나는 종어가 일찌감치 멸종 해버렸고 거의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뒤 살아오면서도 종어에 대해서 관심만은 늘 간직해 왔었다.
언제인지 나는 TV를 보다가 아주 곱게 늙은 할머니가 용봉탕이라는
음식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잉어와 닭을 가지고 만드는 용봉탕은 보기만 해도 넘쳐 흐르는
스테미나가 읽히는 강장 요리였다.

나는 정력에 좋다면 짱뚱어도 먹고 돼지 태아( 애저 )도 먹고
태국에 가서 코브라도 먹는 변강쇠 지향의 내 동창생을 떠올리며 감상을 했다.
며칠 뒤 나는 변강쇠 지향과 통화를 했다.
그 녀석은 용봉탕 따위는 이미 졸업한지가 옛날이라며 새로운
소식이랍시고 그런 것을 말하는 나를 비웃었다.
그리고 용봉탕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잉어와 닭의 컴비네이션은 보통 용봉탕이고 더 좋은 것은 자라와
닭의 결합이라야 상품(上品)이고 더 좋은 특상품은
종어와 닭의 결합이라고 했다.

나는 변강쇠에게서 종어라는 소리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 종어 ? 너 그걸 먹어 봤어?”
변강쇠는 상승 일변도의 강장 음식 강의가 움찔하면서 한 템포 끊겼다.
“ 그 것 안 먹어 봤어.-- 보지도 못했어.”
“ 그렇다면 그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아?”
“-- 모르겠다.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나는 출처를 다그쳐 물었지만 그는 도통 기억을 못했다.
말만 그럴듯했지 종어에 대해서는 나만큼도 몰랐다.

정력 좋아한다는 좀 속물(?)스러운 점만 빼고 박학다식한
그 친구였으니까 어디서인지 종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에게서 종어가 용봉탕의 재료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종어를 다른
방향에서 보기 시작했다.

여러 생각이 났다.

용봉탕이라는 엄청나게 무거운 이름,
이런 이름이 왜 별로 특별 할 것도 없는 음식에 붙었을까 ?

일반 서민 세상에서 개발되었으면 어계탕이니 뭐니하고
조금 친근하고 더 가까운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

용이니 봉이니 하는 상상의 동물이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을 뜻하는 것이다.

서민들이라면 음식에 이런 거창한 이름을 관의 눈치가 보여서
함부로 붙일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이 음식이 한반도의 최고 권력자와 연관이 있다고 봤다.
게다가 종어라는, 다시 말하면 으뜸 고기라는 이름도 다시 되돌아
보게 되었다.
한국의 민물고기처럼 어려운 한자 이름을 거부하고 순수 한국 이름을
고수한 것도 보기 힘들다.
----미꾸라지 가물치 쏘가리 게 피라미 꺽저구 남생이 자라등등

종어의 주변도 예외가 아니다.
그 사촌이 되는 민물고기 들이 전부 한글 이름이다.
그 사촌 이름들을 보자.
-----메기,동자개,빠가사리---

잡스럽고(?) 상스럽고(?) 천하게(?)들리는 토박이 이름 대신 궁중의 벼슬아치들이
상감께서 잡수시는 귀한 물고기의 이름답게 엄청나게 좋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 아닌가?

나는 또 같은 연결선상에서 임천 현감이 종어를 잘 바쳐서 서울로
영전해 같다는 일화도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종어가 맛이 좋다지만 궁궐에서 찾지도 않았는데
일개 현감이 일방적으로 계속 진상을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아마 궁중에서부터 임천현감에게 종어에 대한 특별 지시가
있었던듯하다.

“ 계속 진상하라!”

뭐 이런 지시가 있지 않았을까?

그 것은 조선의 왕들이 별로 건강도 안 좋으면서 후궁이다 뭐다해서
여색을 엄청 밝힌 것은 그저 점잖은 채면에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대단했었다.

특히 강화도령 철종은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농단하기 위해서
강화도에서 데려온 촌놈이었으므로 정치에는 손도 별로 손도 안대고
색(色)에 절어 살다가 일찌감치 승하했었다.

10대에 임금이 된 철종은 14년 6개월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정식 비빈만 여덟 명이나 거느렸다.
사진을 보면 범용스러운 용모에 비쩍 말라 있는 모습이 약하다는
인상도 주고 어지간히 그 방면을 밝히겠다는 인상도 준다.
연산군의 생전에 그를 본사람이 묘사한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면서 후사는 없었고 결혼 후 금방 죽은 공주 하나만
있었을 따름이다.

철종의 입장에서 이쯤 되면 정력제건 강장 음식이건
안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여색과 술을 밝히는 임금들에게 항상
정력 좋은 음식을
수랏상 위에 진상해야 했다.

그것도 한 가지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입맛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의 정력 좋은 강장 메뉴가 골고루 공급되었을 것이다.



많지 않은 물고기 강장 음식 중에서도 용봉탕은 인기 메뉴이었던
듯하다.

다시 한 번 보자.

→ 용봉탕이라는 겁나게 무거운 이름
→ 주변 물고기들의 토속적인 이름을 건너 뚼 종어라는 최고로
점잖은 민물고기 이름. 이놈만 최고의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임천 현감의 궁중진상.
이런 것으로 보면 종어의 위치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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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갑자기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추리가 건너 뛰어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철종은 원래
강화도에서 십대를 보냈다.
강화라는 섬은 해산물이 풍부해서 철종의
입맛이 일찌감치 생선에 젖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철종과 용봉탕과 종어의 관계를 상상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어에게 임금님 진상 고기라는 타이틀과 최고의 이름을
붙게 만든 사람이 철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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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추리로 종어를 다시 평가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 해 도서관에 갔다가 정말 드믈게도
종어에 대해서 쓴 글을 보았다.

아주 짧은 글이었다.

문필가이자 견지낚시의 전문인 송우라는 분이 쓴 낚시 이야기 인데
그 책에 종어의 사진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금방 의아함에 안 빠질 수가 없었다.

종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가만히 숭어같이 생긴 몸체에
땡땡이 무늬가 박힌 놈이었다.

무슨 고기인지도 지금도 통 알 수가없다.
한 때 혼란스러윘지만 역시 정 문기 박사의 책에 실린 박제에서나마
추정할 수 있는 고기를 종어로 생각하기로 했다.
전문가의 말이 더 신뢰성이 있다고 보았다.

블로그를 만들면서 이 종어에 대해서 글을 한번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자료가 없는데 글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한 달 전 기적 같은 일이 내가 멸종했다고 생각했던 종어에
벌어졌다.

어느 날 케이블 TV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 종어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나는 깜짝 놀라서 화면을 응시했다.

알고 보니 중부 내수면 연구소가 금강에서 멸종된 종어를 중국에서
수입해와 드디어 그 번식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종어가 중국에도 살았었구나-!

나는 반가운 기분에 청평에 있는 내수면 연구소 전화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종어 양식을 담당한 김 광석 연구사님이 나에게 언제든지 와서
취재해 가라고 선선히 응락했다.

전화를 끊었지만 멸종되었던 종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는
블로그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글을 좀 더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비록 멸종했지만 종어의 자취라도 찾아 보기로 했다.

나는 부여와 서천군 일대에 수없는 통화 끝에 부여군 양화면에
사시면서 아직도 쪽배를 가지고 민물고기를 잡고 있는
정홍채 선생과 연락이 되었다.

나이 칠순이 넘는 선생은 재미있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었다.

“ 뭐셔 ? 종어? 종어라 -- 아 ! 빠가사리 큰 놈 말여? 그거 내가
잡았지!”

그리고 다시 이야기 했다.
“그 거 임금님 진상 고기여 --- 진상--
맛이 굉장히 좋아서 임금이 잡쉈어--”
“ 언제 잡으셨지요?”
“ 오래 되았서--- 그렁게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에 왔을 때니까
벌써 오십년이 지나가부랐고만 -- ”
“ 어떻게 잡으셨지요?”
" 뗌마 타고 나가서 깡으로 잡았지 !”

뗌마는 전마선의 일본식 발음이 변화된 것이고 깡은 그 무렵에
촌락에 불법으로 많이 거래되던 다이나마이트를 이야기 한다.
그 무렵 한국의 다이나마이트는 지금 이락과 갈이 무슨 테러 목적이
아니라 농민이나 어민들이 물고기를 잡는 위험천만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얼마나 컸지요?”
“내 팔뚝만큼 길었어. 한 70센티정도 되았을껄---”
“잡으신 뒤 종어 다시 보신일 있습니까?”
“있긴 뭐가 있어? 깡으로 잡고 나서 다시는 못 봤어.
그런디 당신 누구여? 요새 금강 밑에 땜 막고 나서
고기가 안 잡혀 죽겄는디 그런 이야기 들응게 신경질나네.
금강 고기들이 지금도 씨가 말라가고 있단 말여.”

나는 감사를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수산계에서는 종어가 멸종한 시기를 3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금강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보낸 분이 종어를 50년대에 잡고
종어는 그림자도 못 봤다고 하시니 종어가 멸종 한 시기가
좀 더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된다.



나는 정 홍채 선생과 통화를 하고 며칠 있다가 청평
중부 내수면 연구소를 방문했다.

김 광석 연수사님이 마침 공무로 외출 하는 길이라서
김경환 씨가 나를 안내했다.

이미 각도의 내수면 연구소에 치어들을 분양해 버렸고
번식을 위한 것들만 남겨놓은 상태여서 종어 숫자는 많지가 않았다.

김 경환씨는 종어의 어미가 2001년 한국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 뒤 내수면 연구소는 여러 연구와 관찰을 통해서 종어에 대한
생태 파악과 이에 대한 최선의 양식법을 개발해냈다고 했다.

그리고 양식업을 하는 분들이 참조 하도록 양식법의 책까지 발간했다.
종어는 물론 내 평생 처음 보았다.

색채는 짙은 회색이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향어의 색깔과 같았다.
몸을 덮은 점액질이 풍성해서 잡으니까 미끈미끈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잘 생긴 메기와 비슷했다.
어쩐지 빠가사리와도 몸 색깔은 달랐지만 인상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중국 종어인 셈인데 한국 종어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김 경환씨에게 물어보았다.
중국 붕어와 한국 붕어의 차이를 잘 아는 나로서
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 한국 토종 종어의 박제 샘플 하나가 모 대학 연구소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대조해봤더니 외형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자료를 더욱 모아서 DNA 분석 같은 정밀
비교 조사는 곧 실시할 예정입니다. "

알고 보니 중국에서도 종어는 그 수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민물 고기라고 한다.

나는 김 경환씨와 종어 외에 여러 민물고기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이 종어가 각 농가로 잘 분양되어서 커다란 수익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기를 바라면서 연구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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