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8일 수요일

호주 들개 딩고의 기막힌 인생[?} 유전

개는 사람의 가장 충실한 동물 친구라고 한다.
그런 인류의 친구가 다른 개 종족과 다른 인생(?)유전의 길을
걸은 개가 있다.

호주의 야생 견 딩고(dingo)는 원래 동남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져있는 종족들이 기르던 개였다.
그들 중 한 계열이 어찌어찌 하다가 사람을 따라서
호주로 흘러 들어 갔다.



호주 원주민은 이미 6 만 년 전부터 호주에 정착해서
살아왔다는데 딩고는 훨씬 늦은 시기인 3,000년 전에
호주에 들어왔다..

그 때만 해도 들개가 아닌 사람과 같이 개로서 이주 한 것이다.


그리고 딩고는 원주민들의 반려자로서 열심히 봉사했다.
원래는 사냥이 딩고의 주특기였었다.그러나 하는 일이 많았다.
날씨가 추우면 딩고가 히터 노릇을 했다.
원주민이 껴안고서 누워서 추위를 견디는 것이다.
그래서 옛 원주민들은 간밤의 온도를 나타날 때 ‘두 딩고 밤’
‘세 딩고 밤---’하고서 표현했다고 한다.
또는 옛 원주민들은 식견 문화가 있어서 비상시에 딩고를 잡아먹기 위한
비상식으로 사육했었다.

그렇게 개로서 호주 대륙에 상륙한 딩고는 서서히 도주해서 들개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제주도 한라산에서 보듯 집개가 산으로 도주해서 들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들개 짓을 하다 보니 아예 집개의 특성을
다 잃어버리고 들개로서의 특성을 많이 갖추게 된 것이다.

달라진 큰 특징 하나만 먼저 들어보자.
딩고는 야생에 오래 있다 보니 개처럼 멍멍 짖는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대신 늑대나 승냥이처럼 우--! 하고
우는 기술을 갖추게 된 것이다.

딩고는 개로 쳐도 비교적 작은 몸을 가지고 있다.
10-20키로의 소형 몸무게에다 마른 몸매의 체형이 언뜻 보면
서울의 뒷거리에서 흔히 보는 잡견과 거의 흡사하다.
머리가 작고 동체가 가는 전형적인 남방견의 표본이다.

다른 들개와 같이 주로 나방이에서부터 캥거루나 목장의 양을
잡아먹는 육식을 하지만 때로는 과일 같은 식물성을 먹이를
섭취하기도 한다.


혼자 살기도 하고 작은 무리로 살기도 한다.
날씬한 남방견의 생김대로 행동은 대단히 빠르고 날쌔다.

딩고는 이리 과의 특징대로 장거리 선수이고 또 그 주력으로
멀리까지 돌아다니므로 서식 범위가 매우 넓다.

딩고는 다른 개과 동물에게 없는 재주를 하나 가지고 있다.
나무를 잘 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개과 동물들이 다 부리는 재주인데도 딩고는
못하는 재주가 하나있다.

수영을 하지 못한다.
물을 만나면 텀벙텀벙 건너기는 해도
문자 그대로 개헤엄 같은 것도 흉내를 못 낸다.

딩고는 야생으로 도주해서 야생에 살면서 뒤에 호주에 온 인간들이
기르는 양 같은 가축에 눈독을 드리고 수시로 목장을 습격해서
이들을 잡아 먹어 목장 주들의 원수가 되었다.

목장주들은 총, 덫, 독약등 모든 수단을 다해 딩고 박멸에
나섰지만 좀처럼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지난 세월동안 사람들은 호주 대륙을 가로 질러가며 딩고 방지용
철조망을 설치했는데 그 길이가 무려 8500키로가 넘었다.
인간이 근대에 만든 건축물로는 가장 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딩고 박멸을 하다 보니 딩고의 먹이인 토끼가 엄청 나게
늘어나서 목초지를 황폐화 시키는 부작용도 만들었다.


이래저래 딩고와 싸우고 죽이다 보니 사람과 딩고사이에 원래가 개였던
딩고를 길러 보는 사람도 늘어나서 야생화를 갔던 딩고 중에 다시 힘든
가축화로 돌아 서게 되는 복귀의 길을 가는 딩고도 생기게 되었다.

딩고의 가축화 시도는 그 역사가 벌써 백여 년이나 된다.
가축을 두고 인간과 끊임없이 인간과 부딪혀온 야생의 딩고는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 집개들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졌다.
호주의 딩고의 80%가 이미 개와 혼혈이 됐다는 조사 보고도 있다.


딩고가 개와 혼혈되어 탄생한 종에 오스랠리아 캐틀 독이라는
종류가 있다. 목장 견 콜리와 딩고의 혼혈된 개인데 콜리의
목장 견으로서의 특성과 야생 견 딩고의 강인함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개라고 한다.


호주의 공식기관의 가축 딩고에 대한 시각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이 딩고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사람 손에 있어도 여전히 해수로 규정할뿐더러 주에 따라서
딩고의 사육을 금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허락하는 주에서도 딩고가 아주 어렸을 때인 생후 6주내에
어미에게서 떼어서 사육된 것에
한해서만 허가된다.

일반이 볼 때 딩고는 흔해 빠진 주변의 잡견으로서 보일 것이고
얕보기가 쉽겠지만 상당히 영리하여 길만 잘 들이면
맹인들의 인도견 노릇도 훌륭히 해낸다.



더해서 사실 야성이 대단히 강하고 잔인한 면모도 가지고 있다.

야생에 있을 때나 집개로 길들여진 후에도 필요하면 저보다
훨씬 큰 동물들과의 격투도 사양치 않는다.

자기가 속한 무리의 암캐가 새끼를 낳으면 그리고 어미개가
강한 개가 아니면 그 새끼를 물어 죽이기도 한다.

호주의 프레이저 섬이라는 곳에서는 딩고가 사람들을
자주 공격해서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죽이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딩고는 길들여져 곁에 두어도 절대 안심할 동물이 아니라
항상 경계 하여야 할 맹수인 것이다.
애견 전문가들은 딩고를 기르고 싶어 하는 애견가들에게 사기전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하기를 권하고 있다.

딩고는 어릴 때부터 부단히 훈련을 시켜서 야성을 소멸 시켜야 한다.
훈련시 심한 신체적 제재는 딩고를 야수로 돌변시켜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으므로 사랑과 인내는 딩고 훈련의 필수 요건이다.

성공적으로 가축화시켜 집개로 만들어도 예측 불허의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므로 어린이와 같이 놀게 하거나 같이 두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나아가 도시의 좁은 가옥, 아파트 같은 실내에서는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운동이 가능한 가두어진 공간에서의
사육을 권장하고 있다 .
딩고는 한국의 일반 가정견처럼 놔 먹여서 집밖 골목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개이다.

그러나 주택가에서는 밤에 야성이 강한 놈 중에 늑대 같이 울부짖는
경우가 있어서 이웃의 항의가 엄청나게 받으므로 사실 이것도 힘들다.
주변에 인적이 드문 시골의 넓은 농장이나 목장 같은 곳이
딩고를 기르기 좋은 환경이다.

호주에서는 도대체 마음 놓을 수없는 딩고를 가정용 개로써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단지 연구 목적이나 동물원의 전시용에 한해서만 허락하고 있는데
이미 해외로 나간 딩고들이 씨를 퍼뜨려 미국에서는 딩고의 분양 업소도 있고
딩고의 협회도 있다.

추측컨대 가정 견으로 판매하는 딩고는 늑대 개처럼 이들도 안심할 수 있는
가축으로 순화시키기 위하여 개와의 교잡을 통하여 어느 정도

일반이 볼 때 딩고는 흔해 빠진 주변의 잡견으로서 보일 것이고 얕보기가 쉽겠지만
사실 야성이 대단히 강하고 잔인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야생에 있을 때나 집개로 길들여진 후에도 필요하면 저보다 훨씬 동물들과의 격투도
사양치 않는다.



자기가 속한 무리의 암캐가 새끼를 낳으면 그리고 어미개가 강한 개가 아니면
그 새끼를 물어 죽이기도 한다.
호주의 프레이저 섬이라는 곳에서는 딩고가 사람들을 공격해서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죽이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딩고는 길들여져 곁에 두어도 절대 안심할 동물이 아니라
항상 경계 하여야 할 맹수인 것이다.
애견 전문가들은 딩고를 기르고 싶어 하는 애견가들에게 사기전
두 번 세 번 심사 숙고하기를 권하고 있다.

딩고는 어릴 때부터 부단히 훈련을 시켜서 야성을 소멸 시켜야 한다.
훈련 시 심한 신체적 제재는 딩고를 야수로 돌변시켜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으므로 사랑과 인내는 딩고 훈련의 필수 요건이다.

성공적으로 가축화시켜 집개로 만들어도 예측 불허의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므로 어린이와 같이 놀게 하거나 같이 두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나아가 도시의 좁은 가옥, 아파트 같은 실내에서는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운동이 가능한 가두어진 공간에서의 사육을 권장하고 있다 .
딩고는 한국의 일반 가정 견처럼 놔먹여서 집밖 골목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개이다.

그러나 주택가에서는 밤에 야성이 강한 놈 중에 늑대 같이 울부짖는
경우가 있어서 이웃의 항의가 엄청나므로 사실 이것도 힘들다.
주변에 인적이 드문 시골의 넓은 농장이나 목장 같은 곳이
딩고를 기르기 좋은 환경이다.

이러고 보니 딩고는 제목에서의 인생 유전 단계에 한 단계를 더 얹어서
들개→ 집개 → 들개 → 집개→들개의 복잡해진 가계도를 만들어야 할 듯하다.
지금 몇 만 년에 걸친 딩고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니 기구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이 글의 제목에서 딩고의 사람인(人)자를 써서 인생 유전이라고 했는데 딩고가
사람이라면 자기의 기구했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투덜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 인간들아! 나 좀 혼자 살게 놔 두라! 나도 뼈대있는 가문 한번 만들어 보자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무스탕 - 야생마의 역사

무스탕이라는 말은 이제 젊은이들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숙해진 단어이다.

무스탕(머스탱)은 이차 세계 대전 때 단 반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탄생한 미군의 걸작 전투기 이름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을 약간 두고 1964년 포드사가 만든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 이름으로서 다시 세간에 그 이름을 날렸다.
포드의 무스탕은 일 년 반 만에 그때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 되었던
백 만대 판매의 대기록을 세워서 자동차 역사에 큰 기념비를 남겼다.
그때의 성공은 무스탕이라는 이름에 엄청난 브랜드 파워를 얹어 줘
남성적이고 활동적인 각 상품 각 분야에 이 이름이 활용되고 있다.

무스탕은 미국 서부에 사는 야생마를 뜻한다.
무스탕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멕시코 식 스페인어인
mestenco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 할 듯하다..


들말이라는뜻의 이 이름이 야생마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스탕들의
조상이 스페인에서 왔었고 이들이 살던 지역인 텍사스와 켈리포니아
사이가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근대의 말은 멕시코를 점령한 코르테즈에
의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서 인도 제도에 1493년, 그리고 미 대륙에는 1519년이 말들이
처음 발을 내 딘 해이다.

북미 대륙에 유입된 대부분의 말들은 초기 스페인인들이 터를
잡고 있던 멕시코를 통해서 북쪽으로 올라 온 것들이다.

그 스페인 말들은 안다루시아 지방 말이나 무어 족들이 남기고 간
아랍 말 종류등이다.

이들 말들 중에 아라비아 말은 말 종류 중에 맵시가 뛰어난 말로
유명한 명화 벤허의 마차 경기에서 벤허의 전차를 끌던 네 마리의 말이다.

그리고 유명한 스페인의 명작 “라만차의 사나이”의 동 키호테가 타던
말인 로시난테도 이런 말 종류였을 것이다.

남북미 아메리카 대륙에 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라스카 북극권 동토 지대 지하에서 얼어있었던 25,000년 전 말의
온전한 사체가 발견되었는데 근대의 말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들 원주민 말들은 인간들이 아시아로부터 베링 해 자리에 있었던
좁은 육지다리를 거쳐 미 대륙에 유입될 무렵인 약 만 년 전에
멸종되고 말았다.

멸종 이유가 추운 기후탓인가 인간들의 사냥 탓인가는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의 말들은 도주해서 야생으로 들어가
미국 무스탕의 원조가 되었다.

무스탕의 확산에 그들의 도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디언들의 초기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북미 인디언들은 말의 도래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 대륙에 말이 살았었기 때문이었는지 넒은 북미 대륙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인디안 들은 공통적으로 "풀들은 기억하리라”라는 줄거리 전개로
말의 도래를 예언하는 신기한 전설이나 신화가 많이 전해 내려 왔었다.

북미 인디언들이 말에 보인 관심은 남미의 인디언들이 말에 보인 관심에
비하면 매우 이색적이다.

남미 잉카 인디언들은 자기 땅을 정복하러온 스페인 불량배 피사로의
부대에 맞섰다.

그들 인디언들은 말도 없었고 또 고전 싸움의 주요 도구인 활도 없는
형편이었다.
인디언 전사들은 스페인 인 들이 타고 온 말을 멀리서 보고 사람과
말이 하나로 붙어있는 괴물로 보았다.

이들이 공포에 휩싸여 우왕좌왕 할 때 마상의 스페인인들은
돌격하며 화살을 날렸다.
인디언들은 날아오는 화살조차 처음 보는 물건이라서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꽂인 뒤에야 비명을 질렀다는 이야기인데
남미 인디언들이 말을 받아들인 정도는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일대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제외하고 북미 인디언들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이었다.

북미 인디언들은 별로 반갑지 않게 자기 고장을 차지한 스페인인들로부터
말을 훔치거나 물물 교환으로 말을 손에 넣기 시작해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원체가 북미 대륙 서부란 넓디넓은 평야지대 인지라 인디언과
말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기 영역들을 찾아 나갔다.

승마는 물론이고 화물 운반, 전투 그리고 사냥 등의 분야에서
대 활약을 한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이 활약했던 중요 분야의 하나가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던 버팔로(들소) 사냥이었다.

빠른 주력을 가진 말들로 버팔로의 떼를 추적하고 포위하여
대량으로 노획할 수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백인들과의 전투였다.
두 용도 다 이미 영화에 자주 소개되어 한국인들에게도
낯익은 모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이 보유하는 말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말이 미 대륙에 소개 된지 백년이 조금 넘어 1680년 미 서부
푸에브로 인디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축출하고 자기들의
자치 국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십년이나 유지했었다.

푸에블로는 1968년 동해상에서 북한에 납치되었던
미 해군 정보 수집함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인데
이 인디언의 부족 이름을 딴 것이다.


그때 이들이 동원한 기병의 숫자가 7,8000기였다고 하니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스페인인들이 불과 수백 명의 병력으로 잉카라던가 아즈텍을 점령하던
시절에 비하면 인디언들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 된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 숫자가 늘어가면서 평원을 떠도는 무스탕의 숫자도
늘어나는 현상도 벌어졌다.


원래 인디언들은 말들을 가두어 두는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도 수시로 이동하면서 살던 터이라 말의 관리가 느슨했었다.
더해서 서쪽으로 몰려오는 백인 서부 개척민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래저래 야생으로 들어오는 말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스탕이 늘어나자 인디언들은 야생마를 잡아서 훈련시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한걸음 나아가 인디언들은 우수한 말들을 서로 교배시켜 우수한
품질의 품종을 만드는 높은 경지로까지 고난도의 육마 기술이
일부 인디언 부족 사이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의 육성에 우수했던 족속들은 호전적인 코만치 족이나 쇼쇼니 족
그리고 지금은 존재가 미미해진 네즈 퍼스(nez perce)족이다.

특히 후자의 종족은 미국 최초의 마종인 아파루사(Appaloosa)종을
만들어냈다. 아래 사진이 아파루사 말이다.
이 말은 표범 같은 개성 있는 무늬를 가진 말이다.
말의 품성을 보면 백인들보다도 앞선 솜씨였다.


인디언들의 뒤를 따라서 그 후에 백인들도 무스탕을 모체삼아
대 여섯 종의 말 품종들,모르간이니 테네시 워커니 하는
신품종의 말을 만들어냈다.


1800년대가 되자 무스탕의 숫자는 훨씬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말 목장은 제주도 말들처럼 방목을 했는데
말들이 도주하기도 쉬웠고 일이 생겨서 말 먹이기가 수월치 없으면
그냥 야생으로 놓아주기도 했다.

이 현상은 목장 근처의 풀들이 말라 붙는 겨울철에 많았다.
말들이 알아서 멀리까지 가서 먹이를 해결하라고 풀어주는
게으른 목장주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놓아주고 다시 봄이 되면 목장 말이 겨울동안 사귀었던
무스탕 무리들을 데리고 원래의 목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으므로
이를 의도적으로 하는 목장주들도 있었다.
멋도 모르고 신참을 따라 왔던 다른 무스탕은 물론 목장주가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스탕은 하루에 최대 80키로까지 기동한다.
아무리 날씨가 춥거나 여건이 안 좋아도
자신들의 먹을거리는 어찌 됐건 찾아내서 생존을 했기 때문에
꿩 먹고 알 먹는 머리 쓰기였을 것이다.

이런 방목 형태는 무스탕의 숫자를 대폭으로 늘렸다.
이런 잡다한 종류의 말들이 야생마에게 합류하자 원래 스페인 말 종류였던
야생마의 혈통도 잡다하게 혼혈되어 원래의 모습이 변해갔다.

사실 남북 전쟁이 지나고 미국은 서부 개척에 국력을 쏟았는데 서부 인디언들의
저항과 수난이 시작되기 시작 했었다.

인디언들은 크레이지 호스니 시팅 불이니 하는 인디언 추장의 지도 아래 안장도
시원치 않은 말을 타고 백인들에게 저항을 했다.

몽골의 기병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서부 개척사는 인디언 기병들의 전쟁사였다.

커스터의 7기병대가 전멸당한 유명한 리틀 빅혼의 전투는 소수의
백인 기병대와 그 스무 배가 넘는 인디언 기병대와의 전투였었다.

서부 인디언 토벌에 동원된 기병들은 인디언들의 탄 무스탕 말들이
자신들이 탄 말보다 지구력이나 스피드에서 훨씬 앞서는 것을 발견하고
놀랬다.

그래서 인디언 토벌의 핵심은 무스탕 멸살이라 생각해서
엉뚱하게 토벌지역의 무스탕들을 포획하기도 했었지만
크게 성과를 보지는 못했었다.

말이 아무리 좋아도 무기가 시원치 않은 인디언들은 저항의 한계를 보였다.
인디언 부족들이 토벌되어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하나씩 끌려 갈 때 이들 부족은
그들이 사랑하는 말을 평원에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무스탕의 식구 수를 늘려 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세기말 미 서 전쟁과 보어전쟁으로 군마의 수요가 늘어나자
말 값이 매우 좋아졌다.
무스탕들은 포획하여 파는 상업적인 포획자들이 늘어
무스탕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20세기경 미 서부에서
황야를 질주하며 마음대로 살던 무스탕들이
거의 이백 만 마리 가량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급속도 서부가 개발되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무스탕들의 서식지도 좁아 들기 시작했다.
개발의 결과로 큰 대형 목장이 계속 늘어 난 것은 무스탕의
서식 환경을 엄청나게 압박하는 것이었다.
교통이 좋아진 이 시대 말들을 놓아주고 뭐고 하는
임의 방목도 형태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26년이 되자 무스탕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애완용 동물 식품( 펫 푸드)시장이 커지자 무스탕들의
생명은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무스탕을 만들어서 펫 푸드 메이커에 파는 직업 사냥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사용하던 사냥 수단인 비행기와 자동차는
무스탕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위협이 되었다.


1971년 미 의회는 무스탕 보호를 위한 법을 통과 시킨 뒤 무스탕들은
잠시 반짝 번식 하는가 했으나 옛날의 영화는 찾지 결코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무스탕들이 남아 있는 숫자는 불과 25,000마리 수준으로
전성기에 비하면 대폭 줄어 든 셈이다.

오늘날 위 숫자의 절반 정도는 네바다 주에 살고 있고 나머지는
오레건 주와 몬타나 주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런 오랜 과정과 곤란을 겪으며 원래 무스탕이었던 말들의 혈통인 스페인 말의
수요는 다 사라졌다고 생각이 추측이 되었는데 아주 외진 곳에 살던
몇몇 무스탕 떼들의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놀랍게도 원래의 무스탕 원조인
스페인 말들의 유전인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400년도 더 된 종을 보존해온 그들의 독립된 역사가 새삼 놀랄 만하다.


무스탕은 이제 동물세계에서 그 위치가 많이 축소되어가지만
그 기다란 말갈기를 바람에 휘날리며 초원을 질주하던 야성적이고 힘센
모습은 이 산업화 시기에 좀체 보기 드물게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 이미지였다.

1971년 미국 의회는 무스탕 보호의 법안을 통과 시키며 이런 결의안을
통과 시켰었다.

“ 무스탕은 서부의 역사적이고 개척자적인 정신의 심벌로서 앞으로도
미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다양성에 기여 할 것이다”


위의 결의안 이상 더 현대 사회에서의 무스탕의 의미를 표현 하기는 힘들다.

인간의 현대 정신세계에서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스탕의 이미지가
갖는 가치가 그들이 먼 옛날 황야를 달리던 시절보다 수 십 배 크다는 말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세계 절대 최고 추남 동물 - 모래 쥐

세상에서 못생긴 동물을 꼽아 보려면 대개 순위에 들어오는
것들이 몇 개가 있다.

천산갑이나 아프리가 땅 돼지, 뿔사슴의 암놈, 아드바크등등--

이런 추남들은 웹에도 자주 등장하여 그런대로 그 기이한 인기 몰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오늘 이 블로그에 들어오신 분들은 최고 추남의 타이틀은
주저 없이 지금부터 써가는 이 글의 주인공에게 수여 할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짜 추물이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이 친구의 영어 이름은 상당히 길다.
'naked mole rat'이라고 하는데 번역하자면 ‘벌거벗은 두더지 쥐’다.
그래서 이 동물의 본 고향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간단히 sand rat,
모래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도 편의상 이 이름으로 주인공을
부르기로 하자.

모래 쥐는 케니아, 소말리아, 남부 이티오피아 등의 동부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의 드문드문 서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지역의 땅 속에 산다.
모래 쥐의 존재에 대해서 아프리카 토인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지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지하에서만 사는 이 쥐에 대해서 백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모든 동물이 거의 다 밝혀진 현대에까지도
모래 쥐는 요 근래에 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동물이었다.

이 비밀의 동물에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70년 대가 되어서이다.
이 쥐는 생김생김과 습성에 있어 여러 특징이 있다.
너무도 그 특징이 유별나서 분류학적으로 비슷한 생리구조를 가진
사촌이 하나도 없어 속[屬-genus]으로서는 이 쥐가 유일하다.

주변에 비슷한 동물이 전혀 없는 유일한 모래 쥐는 그 특성 때문에
분류학적으로 아예 자기 혼자만 소유하는 전문 속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 유별난 특징부터 간단히 소개 해보자.

먼저 이야기 하자면 젖을 먹고 사는 포유류인데도
뱀과 같은 찬피가 혈관에 흐른다.
그래서 혈액에 의한 신체의 온도 조절이 가능 하지가 않아
항상 일정한 상온에서 살아야 한다.
화상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피부에 없어서 황산을 발라도 고통에 대한
반응이 없다.

고등 동물인 포유류인데도 사는 곳과 사는 것이 곤충인 개미와 꼭 같다.
모래 쥐는 생쥐와 같이 비교적 작은 사이즈를 가졌다.
10센티 내외의 작은 몸이고 무게는 30그램 정도다.

눈은 실처럼 찢어진 작은 것인데 형체를 구분 할 줄을 모르고
단지 명암만을 구분 할 뿐이다.
평생을 암흑 속에서 사는 동물로서 굳이 시력은 필요 없을 것이다.


사진에서 보시다 시피 귓바퀴는 흔적 정도만 남아있고 몸에 난
솜털 수준의 빈약한 털들도 셀 수 있을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름에 ‘벌거벗은 ---’ 의 형용사가 붙을 만도 하다.
평생 굴속에서 사는데 보온을 위한 털 따위가 필요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앞에 바다 코끼리의 그 것처럼 앞으로 튀어 나와 있는 두 개의
이빨은 땅을 파기 위한 도구이다.
바다코끼리와 다른 특징은 입을 다물고 여는 것은 이빨과
전혀 없어서 입술을 닫고 굴을 파갈 수가 있다는 점이다.
입을 연다면 작업 중에 계속 흙이 입으로 들어와 곤란한 점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이 이빨로 땅굴을 파는 솜씨는 놀라워서 한 무리가 석 달 동안
합계무려 5키로의
부챗살 같은 땅굴을 파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폐는 극히 작아 공기 유통이 힘든 굴속에서 아주 작은 양의 산소로만
생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굴속의 적은 양의 산소만 가지고 살기 위해서
호흡도 대단히 미약하게 한다.

가장 특징은 이 생쥐의 피가 전혀 따뜻하지가 않고
뱀처럼 차갑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는 신체의 온도 조절을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포유류의 특징인 변온 동물이라는 단어는 이 모래 쥐에
한해서는 적용이 안 되는 말이다.
모래 쥐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화상 등의 고통을 전달하는 P물질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없어서
피부에 황산 같은 것이 부어져도 전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굴속에 살지만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처지에 ‘쥐‘라는
이름 값을 해서 동작이 제법 빠르다.
더해서 몸을 돌리기 곤란한 좁은 굴에서만 살아 놔서
후진하는 속도가 전진하는 속도와 꼭 같은 기발한
구보 실력을 발휘한다.

가뭄 같은 재난을 만나면 신체 대사의 단 사분지 일만 쓰면서
동면 하듯이 버틴다.
모래 쥐에게 나무 같은 지상 식물 뿌리에 혹처럼 형성된 큰 덩이가
이들의 주식이다.
먹이치고는 대단히 독특하다.
이 뿌리의 혹 덩이를 파먹다가
어느 정도 먹었다 싶으면 거기까지 도달한 땅굴을 폐쇄하고
출입을 자제한다.

그리고 세월을 기다린다.
다시 뿌리 덩어리가 어느 정도 되 자라서 크기를 회복하면
다시 막았던 길을 터서 출입을 시작 한다.
그러니까 길러서 먹겠다는 것이니까 모래 쥐도 일종의
농사를 짓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보아야겠다.



모래 쥐들은 집단으로 산다.
대개 7-80마리 정도의 크기 집단이지만 먹이가 풍부한 곳에서는
무려 300 마리까지도 땅굴에서 몰려 산다.
수시로 땅굴을 파고 또 파고 또 파서 나무줄기처럼
여기저기 파 놓은 굴의 총 합계 길이가 대개는 수 키로가 넘는다.

신체적, 그리고 생리적인 독특함에 더해서 모래 쥐는
생태적으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모래 쥐의 조직 내 구성과 생활은 포유류 같지가 않고
개미나 벌을 닮았다.
개미 굴을 파보면 거기에 여왕개미가 있고 일개미가 있고
병정개미가 있듯 모래 쥐의 굴속에도 여왕 쥐가 있고
병정 쥐가 있고 일꾼 쥐가 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엄격한 계급 체계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이들과 생태학적으로 비슷하게 사는 쥐들 집단이 있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다마라랜드 두더지 쥐들은 생리적으로는 모래 쥐와
닮은바 없으나 개미의 집단처럼 사는것은 모래 쥐와 꼭같다.

여왕 쥐는 평균 암컷보다도 훨씬 크다.
여왕 쥐는 한두 마리의 종족 번식용 힘센 한 마리에서
두세 마리의 남자 비빈(妃嬪)을 거느린다.
남자 쥐들은 부지런히 성적으로 여왕님을 모시어 새끼를 생산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집단 내에서 여왕 쥐의 근친 교배가 많아 같은 집단의
모든 모래 쥐들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대단히 비슷하다.

여왕 쥐는 단연 철권 통치를 한다.
감히 여왕에게 도전하는 쥐는 거의 없다.
여왕 쥐는 다른 암쥐들이 임신을 못하도록 감시하고 어기면
폭력적인 징벌을 가한다.
병정 쥐는 방위를 담당한다.
성 구별 없이 암수 다 자질만 되면 병정 쥐가 된다.
다른 집단이나 다른 동물들이 침범해오면 맹렬히 공격해서 격퇴시킨다.

맨 아래 계급에 놓인 일꾼 쥐는 체격이 가장 작다.
일꾼 쥐들은 죽도록 굴을 파고 먹이를 챙겨 와야 한다.

여왕이 죽으면 집단 내에 왕위 계승을 위한 격렬한 투쟁이 있고
차기 여왕이 등극하여 전 여왕과 꼭 같이 남자 비빈을 거느리고
부하들을 거느리며 철권통치를 한다.

벌 들이 분봉을 하듯 이들 모래 쥐도 실력 있는 여자 지도자가 생기면
나름대로의 무리를 만들어 또 다른 집단을 만들어서 분가해버린다.



다행히 멸종의 위기는 없다고 한다.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특징을 가진 모래 쥐들은 그들의 서식지가
농경지도 아니고 개발지도 될 수없는 건조한 초원지대의 지하라서
자기들 나름의 종족은 잘 보전해 나가고 있다.

모래 쥐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기록 해 놓고 싶은 것은 우리 눈에는
무슨 몹쓸 병에 걸린 같아 시원치 않아 보이는 모래 쥐의 평균
수명이 쥐 중에서도 최장인 25년(동물원 관찰)이나 된다고 한다.


이만한 크기의 동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장수 동물이다.
훨씬 장수 할 것 같이 보이는 개보다도 훨씬 길고 코끼리와도 비슷하다.

멸종 금강 종어 돌아오다

한국 민물고기 중에 너무 특이해서 나의 관심을 끌던 물고기가
몇 증류 있었다.
1961년 한강 다리 아래서 낚시꾼에 의해서 잡힌 어린 아이만 했던
철갑상어와 개마고원의 맑은 계류에만 산다는 크고 맛좋은 자치--

그러나 역시 제일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금강에 살았던 종어였다.
이고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배를 타고 오르내리던 금강에 살다가 멸종했다는
그 민물고기에 대해서 아는 그 지역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먼저 그 멸종 민물고기에 대해서 설명부터 보자.
--- ----- ----- -----------

잉어목 동자개과의 민물고기. 전체 길이 30∼100㎝. 몸은 길고 몸통은
옆으로 납작하며, 몸의 높이는 등지느러미의 기점에서 가장 높다.
머리는 위아래로 납작하고 머리의 배쪽은 편평하며 주둥이는 나와 있다.
입은 주둥이의 밑에 있고 눈은 작으며 머리의 옆면 중앙보다 앞쪽에 있다.
아래턱은 위턱보다 짧다. 옆줄은 완전하고 몸의 옆면 중앙보다 약간 위를 직선으로 달린다.
가슴지느러미가시의 바깥쪽에는 톱니가 없고 매끄럽지만 안쪽에는 10여 개의 톱니가 있으며,
등지느러미살은 7개이고 뒷지느러미살은 14∼18개이다.
등쪽은 암황갈색이고 배쪽은 담백색이다.
각 지느러미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흑갈색이다.
큰 강 하류의 물이 탁하고 바닥에 모래와 진흙이
깔려 있는 곳에서 살며 주로 낮에 활동한다. 한국·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 ---- ------------- ------------- ------------


이 민물고기는 너무나 맛이 좋아서 상감께 진상했었다는 전설을 달고 있다.
그 맛이 고기중의 으뜸이라서 고기 앞에
으뜸을 뜻하는 종(宗) 짜가 붙어서 종어라 불리웠다는 배경에서부터
나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나는 종어를 우리나라 수산학의 태두 정문기 박사님이 쓴
어류 박물지라는 책에서 처음 만났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이 책의 초판일이 60년대였다.

책은 종어가 금강 중 하류 지역 특이 부여군에서 많이 났으며
이제는 거의 멸종상태라고 했다.

책에 실린 종어 사진을 보니 살아있는 실물이 아니라
말린 것이어서
실물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야 그것이 박제로 만든 종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도 박제로 실물을 대신 할 만큼 종어는 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메기와 명태를 합쳐놓은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듯 했지만
박제가 된 종어의 모습으로는 종어의 실제 모습을 추측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내가 종어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종어가 상감께 진상하던
귀한 민물고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정 문기 박사님 책에는 이 종어가 금강 줄기에서도 주로 은진이나
임천이라는 곳에서 많이 잡혔다고 했다.

궁중에서도 맛 좋은 종어는 잘 알았고 이를 상감의 수랏상에
자주 올렸다.
임천은 지금은 부여군에 속한 한 개 면이지만 옛날에는
현감이 다스리던 제법 큰 고을이었다.

임천 현감은 부지런히 종어를 궁중에 진상했고 이 과정에서 인맥도
쌓아 현감 임기가 끝나면 서울로 영전해 갔다고 했다.

그래서 종어에 현감 고기라는 별칭도 붙어있다.

정 문기 박사님의 글을 읽고 인상 깊게 종어를 기억하게 된 나는
그 뒤 항상 종어의 정보에 신경을 썼었다.
언제인가 그러니까 금강 하구에 하구 둑이 설치되기 전 강경의
모 음식점에 간 일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서있는 금강 강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그 집은
웅어회와 복찜을 잘했다.

인심 좋게 생긴 아주머니는 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 음식점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내려온 역사가 몇 십 년은 된 오래된 집이었다.
메뉴가 주로 강에서 나는 물고기를 가지고 만든 것들이었다.
생각해봐도 종어를 잘 아실만한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종어에 대해서 물어 봤더니 기대 밖으로
그 아주머니는 잘 모르고 계셨다.


나는 종어가 일찌감치 멸종 해버렸고 거의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뒤 살아오면서도 종어에 대해서 관심만은 늘 간직해 왔었다.
언제인지 나는 TV를 보다가 아주 곱게 늙은 할머니가 용봉탕이라는
음식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잉어와 닭을 가지고 만드는 용봉탕은 보기만 해도 넘쳐 흐르는
스테미나가 읽히는 강장 요리였다.

나는 정력에 좋다면 짱뚱어도 먹고 돼지 태아( 애저 )도 먹고
태국에 가서 코브라도 먹는 변강쇠 지향의 내 동창생을 떠올리며 감상을 했다.
며칠 뒤 나는 변강쇠 지향과 통화를 했다.
그 녀석은 용봉탕 따위는 이미 졸업한지가 옛날이라며 새로운
소식이랍시고 그런 것을 말하는 나를 비웃었다.
그리고 용봉탕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잉어와 닭의 컴비네이션은 보통 용봉탕이고 더 좋은 것은 자라와
닭의 결합이라야 상품(上品)이고 더 좋은 특상품은
종어와 닭의 결합이라고 했다.

나는 변강쇠에게서 종어라는 소리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 종어 ? 너 그걸 먹어 봤어?”
변강쇠는 상승 일변도의 강장 음식 강의가 움찔하면서 한 템포 끊겼다.
“ 그 것 안 먹어 봤어.-- 보지도 못했어.”
“ 그렇다면 그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아?”
“-- 모르겠다.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나는 출처를 다그쳐 물었지만 그는 도통 기억을 못했다.
말만 그럴듯했지 종어에 대해서는 나만큼도 몰랐다.

정력 좋아한다는 좀 속물(?)스러운 점만 빼고 박학다식한
그 친구였으니까 어디서인지 종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에게서 종어가 용봉탕의 재료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종어를 다른
방향에서 보기 시작했다.

여러 생각이 났다.

용봉탕이라는 엄청나게 무거운 이름,
이런 이름이 왜 별로 특별 할 것도 없는 음식에 붙었을까 ?

일반 서민 세상에서 개발되었으면 어계탕이니 뭐니하고
조금 친근하고 더 가까운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

용이니 봉이니 하는 상상의 동물이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을 뜻하는 것이다.

서민들이라면 음식에 이런 거창한 이름을 관의 눈치가 보여서
함부로 붙일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이 음식이 한반도의 최고 권력자와 연관이 있다고 봤다.
게다가 종어라는, 다시 말하면 으뜸 고기라는 이름도 다시 되돌아
보게 되었다.
한국의 민물고기처럼 어려운 한자 이름을 거부하고 순수 한국 이름을
고수한 것도 보기 힘들다.
----미꾸라지 가물치 쏘가리 게 피라미 꺽저구 남생이 자라등등

종어의 주변도 예외가 아니다.
그 사촌이 되는 민물고기 들이 전부 한글 이름이다.
그 사촌 이름들을 보자.
-----메기,동자개,빠가사리---

잡스럽고(?) 상스럽고(?) 천하게(?)들리는 토박이 이름 대신 궁중의 벼슬아치들이
상감께서 잡수시는 귀한 물고기의 이름답게 엄청나게 좋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 아닌가?

나는 또 같은 연결선상에서 임천 현감이 종어를 잘 바쳐서 서울로
영전해 같다는 일화도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종어가 맛이 좋다지만 궁궐에서 찾지도 않았는데
일개 현감이 일방적으로 계속 진상을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아마 궁중에서부터 임천현감에게 종어에 대한 특별 지시가
있었던듯하다.

“ 계속 진상하라!”

뭐 이런 지시가 있지 않았을까?

그 것은 조선의 왕들이 별로 건강도 안 좋으면서 후궁이다 뭐다해서
여색을 엄청 밝힌 것은 그저 점잖은 채면에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대단했었다.

특히 강화도령 철종은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농단하기 위해서
강화도에서 데려온 촌놈이었으므로 정치에는 손도 별로 손도 안대고
색(色)에 절어 살다가 일찌감치 승하했었다.

10대에 임금이 된 철종은 14년 6개월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정식 비빈만 여덟 명이나 거느렸다.
사진을 보면 범용스러운 용모에 비쩍 말라 있는 모습이 약하다는
인상도 주고 어지간히 그 방면을 밝히겠다는 인상도 준다.
연산군의 생전에 그를 본사람이 묘사한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면서 후사는 없었고 결혼 후 금방 죽은 공주 하나만
있었을 따름이다.

철종의 입장에서 이쯤 되면 정력제건 강장 음식이건
안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여색과 술을 밝히는 임금들에게 항상
정력 좋은 음식을
수랏상 위에 진상해야 했다.

그것도 한 가지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입맛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의 정력 좋은 강장 메뉴가 골고루 공급되었을 것이다.



많지 않은 물고기 강장 음식 중에서도 용봉탕은 인기 메뉴이었던
듯하다.

다시 한 번 보자.

→ 용봉탕이라는 겁나게 무거운 이름
→ 주변 물고기들의 토속적인 이름을 건너 뚼 종어라는 최고로
점잖은 민물고기 이름. 이놈만 최고의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임천 현감의 궁중진상.
이런 것으로 보면 종어의 위치가 짐작된다.
---- ---- ---- - ---- - -- - --
여기서 갑자기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추리가 건너 뛰어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철종은 원래
강화도에서 십대를 보냈다.
강화라는 섬은 해산물이 풍부해서 철종의
입맛이 일찌감치 생선에 젖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철종과 용봉탕과 종어의 관계를 상상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어에게 임금님 진상 고기라는 타이틀과 최고의 이름을
붙게 만든 사람이 철종이 아닌가 싶다.

------------ ----- - ---- ------
나는 이런 추리로 종어를 다시 평가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 해 도서관에 갔다가 정말 드믈게도
종어에 대해서 쓴 글을 보았다.

아주 짧은 글이었다.

문필가이자 견지낚시의 전문인 송우라는 분이 쓴 낚시 이야기 인데
그 책에 종어의 사진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금방 의아함에 안 빠질 수가 없었다.

종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가만히 숭어같이 생긴 몸체에
땡땡이 무늬가 박힌 놈이었다.

무슨 고기인지도 지금도 통 알 수가없다.
한 때 혼란스러윘지만 역시 정 문기 박사의 책에 실린 박제에서나마
추정할 수 있는 고기를 종어로 생각하기로 했다.
전문가의 말이 더 신뢰성이 있다고 보았다.

블로그를 만들면서 이 종어에 대해서 글을 한번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자료가 없는데 글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한 달 전 기적 같은 일이 내가 멸종했다고 생각했던 종어에
벌어졌다.

어느 날 케이블 TV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 종어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나는 깜짝 놀라서 화면을 응시했다.

알고 보니 중부 내수면 연구소가 금강에서 멸종된 종어를 중국에서
수입해와 드디어 그 번식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종어가 중국에도 살았었구나-!

나는 반가운 기분에 청평에 있는 내수면 연구소 전화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종어 양식을 담당한 김 광석 연구사님이 나에게 언제든지 와서
취재해 가라고 선선히 응락했다.

전화를 끊었지만 멸종되었던 종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는
블로그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글을 좀 더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비록 멸종했지만 종어의 자취라도 찾아 보기로 했다.

나는 부여와 서천군 일대에 수없는 통화 끝에 부여군 양화면에
사시면서 아직도 쪽배를 가지고 민물고기를 잡고 있는
정홍채 선생과 연락이 되었다.

나이 칠순이 넘는 선생은 재미있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었다.

“ 뭐셔 ? 종어? 종어라 -- 아 ! 빠가사리 큰 놈 말여? 그거 내가
잡았지!”

그리고 다시 이야기 했다.
“그 거 임금님 진상 고기여 --- 진상--
맛이 굉장히 좋아서 임금이 잡쉈어--”
“ 언제 잡으셨지요?”
“ 오래 되았서--- 그렁게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에 왔을 때니까
벌써 오십년이 지나가부랐고만 -- ”
“ 어떻게 잡으셨지요?”
" 뗌마 타고 나가서 깡으로 잡았지 !”

뗌마는 전마선의 일본식 발음이 변화된 것이고 깡은 그 무렵에
촌락에 불법으로 많이 거래되던 다이나마이트를 이야기 한다.
그 무렵 한국의 다이나마이트는 지금 이락과 갈이 무슨 테러 목적이
아니라 농민이나 어민들이 물고기를 잡는 위험천만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얼마나 컸지요?”
“내 팔뚝만큼 길었어. 한 70센티정도 되았을껄---”
“잡으신 뒤 종어 다시 보신일 있습니까?”
“있긴 뭐가 있어? 깡으로 잡고 나서 다시는 못 봤어.
그런디 당신 누구여? 요새 금강 밑에 땜 막고 나서
고기가 안 잡혀 죽겄는디 그런 이야기 들응게 신경질나네.
금강 고기들이 지금도 씨가 말라가고 있단 말여.”

나는 감사를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수산계에서는 종어가 멸종한 시기를 3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금강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보낸 분이 종어를 50년대에 잡고
종어는 그림자도 못 봤다고 하시니 종어가 멸종 한 시기가
좀 더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된다.



나는 정 홍채 선생과 통화를 하고 며칠 있다가 청평
중부 내수면 연구소를 방문했다.

김 광석 연수사님이 마침 공무로 외출 하는 길이라서
김경환 씨가 나를 안내했다.

이미 각도의 내수면 연구소에 치어들을 분양해 버렸고
번식을 위한 것들만 남겨놓은 상태여서 종어 숫자는 많지가 않았다.

김 경환씨는 종어의 어미가 2001년 한국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 뒤 내수면 연구소는 여러 연구와 관찰을 통해서 종어에 대한
생태 파악과 이에 대한 최선의 양식법을 개발해냈다고 했다.

그리고 양식업을 하는 분들이 참조 하도록 양식법의 책까지 발간했다.
종어는 물론 내 평생 처음 보았다.

색채는 짙은 회색이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향어의 색깔과 같았다.
몸을 덮은 점액질이 풍성해서 잡으니까 미끈미끈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잘 생긴 메기와 비슷했다.
어쩐지 빠가사리와도 몸 색깔은 달랐지만 인상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중국 종어인 셈인데 한국 종어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김 경환씨에게 물어보았다.
중국 붕어와 한국 붕어의 차이를 잘 아는 나로서
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 한국 토종 종어의 박제 샘플 하나가 모 대학 연구소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대조해봤더니 외형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자료를 더욱 모아서 DNA 분석 같은 정밀
비교 조사는 곧 실시할 예정입니다. "

알고 보니 중국에서도 종어는 그 수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민물 고기라고 한다.

나는 김 경환씨와 종어 외에 여러 민물고기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이 종어가 각 농가로 잘 분양되어서 커다란 수익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기를 바라면서 연구소를 나섰다.

2008년 9월 29일 월요일

남극점 아래까지 갔던 몽골말



몽골 말은 몽골 국의 대표 브랜드 격이지만 사실 별 볼품이 없다.
특징인 것으로 말의 작은 키다.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유럽 측의 기록을 보면 몽골 인들이
‘개만한 말’을 타고 왔다라고 썼다.
사실 서양에서는 몽골 말을 HORSE「말」 이라고 하지 않고 PONY
「조랑말」라고 부른다.
60년대에 ‘벤허’라는 대작 영화가 선보여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엄청난 관객을 불러 모으는 히트를 친일이 있었는데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찰턴 헤스턴과 악역 담당 스티븐 보이드와 벌리는 전차 경주 씬이
압권이다.
여기서 나오는 찰턴 헤스턴의 전차를 끌던 네 마리의 흰 말들은
아라비아 말이다.
아라비아 말은 세계의 내로라하는 마종(馬種)에서
알아주는 미마(美馬)이다.
깔끔한 미모에 비하면 몽골말의 못 생긴 일면이 덧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닥터 지바고와 함께 세기의 명화로 꼽히어 아직도 어지간한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그 테이프 볼 수가 있다.

작은 체구에 더해서 몽골 말의 커다란 짱구 머리와 긴 허리 그리고 굵은
다리 등은 몽골 말을 더욱 촌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못생긴 말이 징기스칸이 오직 15만의 기병을 끌고 아시아를
제패하고 유럽까지 위협했던 정복 사업을 가능케 한
주인공 말이라면 다시 보일 것이다.
몽골말의 내면적인 위력은 그 강인함에서 나온다.
믿기지 않겠지만 두 마리의 말을 교대로 타면서 달리면 하루 종일 달릴
수가 있다고 한다.

몽골의 여름에는 국가적인 행사인 나담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의 압권은 25 킬로를 달리는 장거리 말 경주다.
전속으로 달리는 이 경주를 끝내고 기진맥진해서 죽는 말들도 있다.
20세기 초에 이 경기에 백계 러시아인들이 자기들이 가져온 키 큰
러시아 말을 타고 출전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진국의 작은 말들이 뛰는 경주라고 얕잡아 보고 거드름을
피우며 참가 했다가 대부분 중도 탈락해서 체면을 구겼었다.
몽골 기병들은 물에 타서 먹을 수 있는 말린 소고기 가루 한 자루를
「한달간 식량이다.」휴대하고 몽골 말을 타고서 보급과 재정비의
휴식 없이 서양의 기병들이 상상도 못하는 기동력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몽골말의 특징은 스피드에서의
강인성이 아니라믿기 힘든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는 생리적인 강인성이다.

몽골말은 엄청나게 추운 날씨에도 외양 칸이 아닌 노지에서 끄떡없이
버티어내는 기막히게 강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시베리아에 꼭 붙은 북방인 몽골의 겨울은 영하 30도 대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동토의 고장이다.
방목하는 소의 꼬리가 얼어 붙어서 툭툭 부러 진다는 잔인한 냉기가
몽골의 산하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엄청나 추위를 말들은 아무런 방한 시설도 사료도 없이 노천에서
그냥 얼은 땅의 시든 풀을 뜯어 먹으며 버티는 것이다.

19세기 중앙아시아를 탐험해서 세계 유일의 몽골 야생말을 비롯한
여러 발견과 기록을 남긴 러시아의 탐험가 쁘르제발리스키 대령은
이렇게 몽골 말에 대해 썼다.
“ 그 특징은 키가 평균보다 작고 다리와 목이 굵다는 것이다.
머리는 커다랗고 털은 빽빽하고 꽤 길며 성격상 특징으로는
지구력을 들 수 있다.
가장 추운 시기에도 몽골 말은 방목 상태로 살아가며
적은 풀로도 잘 견딘다.
게다가 러시아 말에 비하면 훨씬 야무지다고 한다.
러시아 말은 몽골말이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조건에서도
한 달 이상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몽골 말의 이 강인한 특성에 눈길을 준 사람이 남극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의 탐험가
새클턴이었다.
그는 1916년 그의 배가 남극 대륙 연안에서 조난당하자 배의 구명보트를
타고 세계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남빙양의 거친 파도를 뚫고 2 주간
1300 키로나 횡단하여 사우스 조지아섬 무사히 도착, 그와 같이 탐험에
나섰던 탐험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해 낸 무용담으로 유명하다.


새클턴은 몽골말의 강인성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식량 보급이 극히 힘든 남극 탐험에서 운반 량 대비 식량 면에서
에스키모개들보다 몽골말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는 1907년도에 남극 탐험에 나설 때 몽골 말들을 북만주에서 구입하여
북만주란 겨울에 극히 추운 흑룡강 성 북쪽 내몽고 지역 일 것이다.
말들은 천진 항을 거쳐 3주간의 항해 끝에 뉴질랜드의 리델톤항에서 정박 중이던
새클턴의 탐험선 님로드에 적재되어 남극으로 향했다.
「말들을 몇 마리나 구입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기록을 찾지 못했다.」

말들은 거친 바다를 거쳐 남극 대륙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많이 죽고
그중 네 마리만이 새클턴의 남극장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접근도 거절해온 죽음의 땅
남극 대륙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몽골말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극탐험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천지였다.
도처에 널린 눈이 쌓인 곳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이런 곳은 눈이 말배까지 차서 오히려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말 들을 도와 주어야 했다.
눈 쌓인 곳이 아닌 곳은 빙판이었다.
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아니라 둥그런 발굽을 가진 말들은
이런 빙판에서는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어기적거리며 걷는 말들을 또 부축하느라 지체해야 했다.
옛 기병대들은 이런 빙판길에서는 말에다 스파이크 달린
편자를 박았었는데바다 사람(항해사)이었던 색클턴은 말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던듯하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거대한 빙판인 남극의 대륙곳곳에 깊이 갈라진
크레바스라고하는 빈 공간인 얼음 간격들이었다.
그 깊이가 수 미터의 깊이에서 바닥이 보이지 않게 깊은 것까지
여러 종류였다
얕고 깊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레바스는 위가 또 눈으로 덮여 있어서 잘못 밟으면 사람이건 말이건
깊은 함정으로 빨아 드렸다.
여러 다른 개들과 묶여 있다면 그래도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구하기가 쉬었지만 말은 그렇지가 못했다.
설사 바닥이 얕은 크레바스에서 추락해서 목숨을 건진 경우에 무게가
가벼운 개라면 건져 낼 수가 있었지만 말은 그러지가 못했다.

기지를 만들어 가며 전진 하던 색클턴은 부하 네 명과 함께
1908년 10월 13일드디어 마지막 베이스 캠프에서 말 네 마리만 끌고
극지점을 향한 돌진을 개시했다.
그는 그의 일지에 몽골말 네 마리의 이름을 기록해놓았다.
그리시, 콴, 차이나맨, 그리고 삭스이다.
대원들은 말을 타고 출발했고 말들은 썰매를 뒤에 달고
설원의 길을 뚜벅뚜벅 갔다.
그러나 전진하면서 시련은 시작되었다.

간단없이 눈보라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폭풍은 매서운 추위를 동반하고 찾아왔다.
밤이 되면 추위는 더했다.
대원들은 말 주위에 눈 답 벼락을 쳐주고 담요 같은 것을 걸쳐주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으나 자연은 무자비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말발굽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얼어붙어 있어서
이것을 깨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말들은 나날이 여위어져 갔다.

이런 고통 속에 전진이 한 달을 지나서도 계속되자 11월 21일
남위 81도 지점에서 차이나 맨이 쓰러지고 연달아 그리시와 콴이 죽었다.
색클턴은 착잡한 마음으로 이들 말들의 고통울 덜어주기
위해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들이 처한 엄중하고 절박한 상황은 감상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에 영양실조에 걸린 대원들은 죽은 말의 고기로 스프를 만들어먹고
나머지는 귀환 할 때의 보급을 생각해서 중간 중간 비축해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서 200키로가 넘는 썰매를 기진맥진하게 끌던 삭스에게
최후가 찾아왔다.
그 최후는 너무 극적이었다.
1908년 12월9일이었다.

색클턴의 일지는 이를 생생히 기억해놓았다.
“ 뒤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와일드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급히 뒤를 돌아보았더니 와일드는 썰매와 함께
삭스와 함께 크레바스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로프를 가지고 급하게 달려갔다.
우리가 거들어 줘 와일드는 겨우 빠져 나왔다.
운 좋게도 썰매는 건져냈지만 삭스는 이미 아득한 크레바스의
밑바닥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깊은 크레바스인지 캄캄한 밑바닥에서는 삭스의 기척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몽골말 삭스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사라졌지만 영예로운 기록을
몽골말의 역사에 하나 남겨놓았다.

다음 날 12월 10일 색클턴은 남위 85도를 넘었다.
이사실은 삭스가 남위 84도까지 갔다는 말이다.
이런 극한 지역의 최남단은 그때까지 색클턴의 탐험대를 빼놓고 어느 인간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고 더구나 네발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까마귀나
독수리 같은 것도 감히 와보지를 못한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항공기들이 남극 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제발로 이런 최 남위까지 온 네발 동물을 삭스가
마지막일 듯싶다.
이런 극지를 최후의 몽골말 삭스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자연의 재앙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정말 세계를 뒤흔든 몽골 전사 집단의 후예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불굴의 색클턴은 전진을 계속 남위 88도 23분까지 갔지만 식량 부족에 지치고
병든 대원들의 귀환이 불투명해지자 남극 지척에서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비극으로 끝난 몽골말의 남극 탐험 참가는 4년 뒤 이미 남극 탐험의
경험이 있었던 영국 해군 대위 로버트 스코트에 의해서 다시 시도된다.
스코트는 1902년 디스커비리호를 타고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색클턴과 마찬가지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중도에서 돌아온 바 있었다.
이 배에 색클턴이 그의 부하로 타고 있었다.

스코트는 10년 뒤인 1911년 다시 남극 탐험에 나섰는데 이때 몽골말을 색클턴처럼
역시 북만주에서 구입해서 남극으로 데려갔었다.
색클턴의 몽골말 사용 경험이 결정의 큰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색클턴의 경험을 알았으면 누구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색클턴과 스코트는 1902년도 탐험 때부터 사이가 나빠져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는 앙숙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둘이서 서로를 비방하는 사례가 상당히 남아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남극 탐험을 꿈꾸고 있던 색클턴이 그의 탐험 성공을
가로막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처절한 실패로 끝난 스코트의 두 번째 탐험은 첫 번부터 액운이 따라 붙었다.
색클턴의 말들은 뉴질랜드의 말 전문가가 보고도 감탄할 우수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스코트의 말들은 그 결과가 말해 주듯 신통치가 않았었다.
기록에 의하면 스코트와 함께 남극 대륙에 상륙한 말은 열아홉 마리였다.
그에게 더 커다란 액운이 따랐던 것은 남 북극 탐험으로 잔뼈가 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같은 시기에 남극 탐험에 나서 썰매 개 100마리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상륙 한 것이다.
노련한 그는 말이나 모터 설상차 따위의 실험에 유혹을 받지 않고 철저히 에스키모의
방법을 답습했다.


복장부터가 에스키모들이 입는 아노락이라는 순록 가죽으로 만든 옷을 채택했다.
볼품은 없었지만 그 방한 효과가 수천년 동안 증명 된 것이었다.
더 해서 개들도 최상의 것들이었고 경비견처럼 명령일하에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최상의 훈련을 받은 것들이었다.
더해서 그들 대원들은 노르웨이인답게 전부 스키의 도사들이었다.
반면 스코트는 영국을 출발하고 나서 배에 타고 나서야 스키를 배우자고 지시할
정도였으니 결과가 뻔해 보였다.
스코트는 1910년 남극에 상륙하여 기지를 만들고 여러 관측과 준비 끝에
1911년 11월 1일 그는 다섯 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정복의 장정에 나섰다.
스코트는 그간 죽거나 병든 말을 남기고 남은 여덟 마리의 몽골말과 함께
수 십 마리의 개를 데리고 출발했었다.

그러나 액운은 그를 계속 붙어 따라 다녔다.
새클턴 때보다도 유독 더 심한 눈보라 폭풍이 출발 뒤 수시로 이들을
따라 붙었다.
여러 대원들이 걱정하던 말들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월 24일 말 한 마리가 죽었고 12월1일 또 한 마리가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상황은 12월 6일 몰아닥친 눈 폭풍은
가공할 정도였다.

닷새 뒤 엄청난 눈 폭풍이 멈추고 이들은 출발을 서둘렀다.
준비를 마치고 말 들을 썰매에 매이려고 할 때 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배를 땅에 붙이고 일어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두들겨 패고 달래고 해서 일으켜 새워봤자 단지 대 여섯 걸음을 걷고는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이들 말들은 혹심한 기후와 노동에 지칠대로 지쳤고 같이 데려 갔던 썰매 개들에게
공격당하여 심하게 부상을 입은 처지라 사실 동물이지만 움직이기기 지긋지긋 했거나
두려웠을 것이다.

더해서 말들의 수준이 새클턴의 말들과는 확실히 낮았다는 평가도 여기서
나타난다.
열 한 시간동안 말들과 씨름하던 스코트는 할 수없이 이들을 전부 도살하고
가죽을 벗긴 다음 고기는 올 때를 대비해서 얼음 속에 저장했다.
그 뒤 말이 끌던 썰매를 사람들이 끌면서 전진을 거듭하여 스코트는
드디어 1912년 1월 16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달도 전인 1911년 12월 14일
다녀간 아문센이 꽂아 놓은 노르웨이 국기와 스코트와 영국 왕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스코트가 그 곳에 도달 할 때까지 걸린 기간보다 23일간이나
짧은 단축된 기록이었다.
낙심한 스코트는 갖은 고통을 겪으며 귀환 길에 오른다.
식량 부족으로 빈사 상태였던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묻어 놓은
말고기로 부족한 영양을 보충했다.

말고기로 스코트 대원들의 생명은 얼마간 연장되었을 것이다.
이 것이 몽골말들이 스코트에게 베푼 최후의 봉사였다.
다시 계속한 귀환 길을 극심한 식량 부족과 눈 폭풍은 이들을 괴롭혔다
두 달 뒤 3월 29일 전신의 삼분지 이에 동상을 입은 스코트는
여러 명에게 유서를 남기고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 하던
동료 두 명과 함께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마흔 세 살 때였다.
그와 그의 동료 사체는 다음 해 가을에 영국 수색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몽골 말들이 남극에서 당한 수난을 생각 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스코트가 에스키모의 개와 같이 북극권의 해안에서 한 두 해 정도 실험 해보고
충분히 보완하여 출발했더라면 그리고 행운이 도와주었다면 새클턴과 같이
남극을 점령하여 인류 유일의 인마(人馬)협동 극지 전복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얼마 전 몽골의 지식인과 함께 몽골 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가 말해준 한 일화가 있었다
1970년도에 월남전이 치열했을 때 몽골은 북 베트남에 수백 필의 말을 지원해준 일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몇 년 뒤 고향으로 귀환하여 전 몽골인 들을 흥분 시켰었다.
그는 그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 여년 전 몽골 말 한 마리가 남극 문턱인 남위 84도까지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보니 몽골말의 팬으로서 어떤 한 작은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