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9일 월요일

남극점 아래까지 갔던 몽골말



몽골 말은 몽골 국의 대표 브랜드 격이지만 사실 별 볼품이 없다.
특징인 것으로 말의 작은 키다.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유럽 측의 기록을 보면 몽골 인들이
‘개만한 말’을 타고 왔다라고 썼다.
사실 서양에서는 몽골 말을 HORSE「말」 이라고 하지 않고 PONY
「조랑말」라고 부른다.
60년대에 ‘벤허’라는 대작 영화가 선보여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엄청난 관객을 불러 모으는 히트를 친일이 있었는데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찰턴 헤스턴과 악역 담당 스티븐 보이드와 벌리는 전차 경주 씬이
압권이다.
여기서 나오는 찰턴 헤스턴의 전차를 끌던 네 마리의 흰 말들은
아라비아 말이다.
아라비아 말은 세계의 내로라하는 마종(馬種)에서
알아주는 미마(美馬)이다.
깔끔한 미모에 비하면 몽골말의 못 생긴 일면이 덧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닥터 지바고와 함께 세기의 명화로 꼽히어 아직도 어지간한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그 테이프 볼 수가 있다.

작은 체구에 더해서 몽골 말의 커다란 짱구 머리와 긴 허리 그리고 굵은
다리 등은 몽골 말을 더욱 촌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못생긴 말이 징기스칸이 오직 15만의 기병을 끌고 아시아를
제패하고 유럽까지 위협했던 정복 사업을 가능케 한
주인공 말이라면 다시 보일 것이다.
몽골말의 내면적인 위력은 그 강인함에서 나온다.
믿기지 않겠지만 두 마리의 말을 교대로 타면서 달리면 하루 종일 달릴
수가 있다고 한다.

몽골의 여름에는 국가적인 행사인 나담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의 압권은 25 킬로를 달리는 장거리 말 경주다.
전속으로 달리는 이 경주를 끝내고 기진맥진해서 죽는 말들도 있다.
20세기 초에 이 경기에 백계 러시아인들이 자기들이 가져온 키 큰
러시아 말을 타고 출전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진국의 작은 말들이 뛰는 경주라고 얕잡아 보고 거드름을
피우며 참가 했다가 대부분 중도 탈락해서 체면을 구겼었다.
몽골 기병들은 물에 타서 먹을 수 있는 말린 소고기 가루 한 자루를
「한달간 식량이다.」휴대하고 몽골 말을 타고서 보급과 재정비의
휴식 없이 서양의 기병들이 상상도 못하는 기동력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몽골말의 특징은 스피드에서의
강인성이 아니라믿기 힘든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는 생리적인 강인성이다.

몽골말은 엄청나게 추운 날씨에도 외양 칸이 아닌 노지에서 끄떡없이
버티어내는 기막히게 강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시베리아에 꼭 붙은 북방인 몽골의 겨울은 영하 30도 대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동토의 고장이다.
방목하는 소의 꼬리가 얼어 붙어서 툭툭 부러 진다는 잔인한 냉기가
몽골의 산하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엄청나 추위를 말들은 아무런 방한 시설도 사료도 없이 노천에서
그냥 얼은 땅의 시든 풀을 뜯어 먹으며 버티는 것이다.

19세기 중앙아시아를 탐험해서 세계 유일의 몽골 야생말을 비롯한
여러 발견과 기록을 남긴 러시아의 탐험가 쁘르제발리스키 대령은
이렇게 몽골 말에 대해 썼다.
“ 그 특징은 키가 평균보다 작고 다리와 목이 굵다는 것이다.
머리는 커다랗고 털은 빽빽하고 꽤 길며 성격상 특징으로는
지구력을 들 수 있다.
가장 추운 시기에도 몽골 말은 방목 상태로 살아가며
적은 풀로도 잘 견딘다.
게다가 러시아 말에 비하면 훨씬 야무지다고 한다.
러시아 말은 몽골말이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조건에서도
한 달 이상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몽골 말의 이 강인한 특성에 눈길을 준 사람이 남극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의 탐험가
새클턴이었다.
그는 1916년 그의 배가 남극 대륙 연안에서 조난당하자 배의 구명보트를
타고 세계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남빙양의 거친 파도를 뚫고 2 주간
1300 키로나 횡단하여 사우스 조지아섬 무사히 도착, 그와 같이 탐험에
나섰던 탐험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해 낸 무용담으로 유명하다.


새클턴은 몽골말의 강인성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식량 보급이 극히 힘든 남극 탐험에서 운반 량 대비 식량 면에서
에스키모개들보다 몽골말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는 1907년도에 남극 탐험에 나설 때 몽골 말들을 북만주에서 구입하여
북만주란 겨울에 극히 추운 흑룡강 성 북쪽 내몽고 지역 일 것이다.
말들은 천진 항을 거쳐 3주간의 항해 끝에 뉴질랜드의 리델톤항에서 정박 중이던
새클턴의 탐험선 님로드에 적재되어 남극으로 향했다.
「말들을 몇 마리나 구입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기록을 찾지 못했다.」

말들은 거친 바다를 거쳐 남극 대륙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많이 죽고
그중 네 마리만이 새클턴의 남극장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접근도 거절해온 죽음의 땅
남극 대륙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몽골말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극탐험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천지였다.
도처에 널린 눈이 쌓인 곳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이런 곳은 눈이 말배까지 차서 오히려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말 들을 도와 주어야 했다.
눈 쌓인 곳이 아닌 곳은 빙판이었다.
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아니라 둥그런 발굽을 가진 말들은
이런 빙판에서는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어기적거리며 걷는 말들을 또 부축하느라 지체해야 했다.
옛 기병대들은 이런 빙판길에서는 말에다 스파이크 달린
편자를 박았었는데바다 사람(항해사)이었던 색클턴은 말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던듯하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거대한 빙판인 남극의 대륙곳곳에 깊이 갈라진
크레바스라고하는 빈 공간인 얼음 간격들이었다.
그 깊이가 수 미터의 깊이에서 바닥이 보이지 않게 깊은 것까지
여러 종류였다
얕고 깊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레바스는 위가 또 눈으로 덮여 있어서 잘못 밟으면 사람이건 말이건
깊은 함정으로 빨아 드렸다.
여러 다른 개들과 묶여 있다면 그래도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구하기가 쉬었지만 말은 그렇지가 못했다.
설사 바닥이 얕은 크레바스에서 추락해서 목숨을 건진 경우에 무게가
가벼운 개라면 건져 낼 수가 있었지만 말은 그러지가 못했다.

기지를 만들어 가며 전진 하던 색클턴은 부하 네 명과 함께
1908년 10월 13일드디어 마지막 베이스 캠프에서 말 네 마리만 끌고
극지점을 향한 돌진을 개시했다.
그는 그의 일지에 몽골말 네 마리의 이름을 기록해놓았다.
그리시, 콴, 차이나맨, 그리고 삭스이다.
대원들은 말을 타고 출발했고 말들은 썰매를 뒤에 달고
설원의 길을 뚜벅뚜벅 갔다.
그러나 전진하면서 시련은 시작되었다.

간단없이 눈보라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폭풍은 매서운 추위를 동반하고 찾아왔다.
밤이 되면 추위는 더했다.
대원들은 말 주위에 눈 답 벼락을 쳐주고 담요 같은 것을 걸쳐주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으나 자연은 무자비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말발굽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얼어붙어 있어서
이것을 깨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말들은 나날이 여위어져 갔다.

이런 고통 속에 전진이 한 달을 지나서도 계속되자 11월 21일
남위 81도 지점에서 차이나 맨이 쓰러지고 연달아 그리시와 콴이 죽었다.
색클턴은 착잡한 마음으로 이들 말들의 고통울 덜어주기
위해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들이 처한 엄중하고 절박한 상황은 감상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에 영양실조에 걸린 대원들은 죽은 말의 고기로 스프를 만들어먹고
나머지는 귀환 할 때의 보급을 생각해서 중간 중간 비축해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서 200키로가 넘는 썰매를 기진맥진하게 끌던 삭스에게
최후가 찾아왔다.
그 최후는 너무 극적이었다.
1908년 12월9일이었다.

색클턴의 일지는 이를 생생히 기억해놓았다.
“ 뒤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와일드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급히 뒤를 돌아보았더니 와일드는 썰매와 함께
삭스와 함께 크레바스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로프를 가지고 급하게 달려갔다.
우리가 거들어 줘 와일드는 겨우 빠져 나왔다.
운 좋게도 썰매는 건져냈지만 삭스는 이미 아득한 크레바스의
밑바닥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깊은 크레바스인지 캄캄한 밑바닥에서는 삭스의 기척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몽골말 삭스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사라졌지만 영예로운 기록을
몽골말의 역사에 하나 남겨놓았다.

다음 날 12월 10일 색클턴은 남위 85도를 넘었다.
이사실은 삭스가 남위 84도까지 갔다는 말이다.
이런 극한 지역의 최남단은 그때까지 색클턴의 탐험대를 빼놓고 어느 인간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고 더구나 네발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까마귀나
독수리 같은 것도 감히 와보지를 못한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항공기들이 남극 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제발로 이런 최 남위까지 온 네발 동물을 삭스가
마지막일 듯싶다.
이런 극지를 최후의 몽골말 삭스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자연의 재앙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정말 세계를 뒤흔든 몽골 전사 집단의 후예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불굴의 색클턴은 전진을 계속 남위 88도 23분까지 갔지만 식량 부족에 지치고
병든 대원들의 귀환이 불투명해지자 남극 지척에서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비극으로 끝난 몽골말의 남극 탐험 참가는 4년 뒤 이미 남극 탐험의
경험이 있었던 영국 해군 대위 로버트 스코트에 의해서 다시 시도된다.
스코트는 1902년 디스커비리호를 타고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색클턴과 마찬가지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중도에서 돌아온 바 있었다.
이 배에 색클턴이 그의 부하로 타고 있었다.

스코트는 10년 뒤인 1911년 다시 남극 탐험에 나섰는데 이때 몽골말을 색클턴처럼
역시 북만주에서 구입해서 남극으로 데려갔었다.
색클턴의 몽골말 사용 경험이 결정의 큰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색클턴의 경험을 알았으면 누구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색클턴과 스코트는 1902년도 탐험 때부터 사이가 나빠져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는 앙숙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둘이서 서로를 비방하는 사례가 상당히 남아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남극 탐험을 꿈꾸고 있던 색클턴이 그의 탐험 성공을
가로막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처절한 실패로 끝난 스코트의 두 번째 탐험은 첫 번부터 액운이 따라 붙었다.
색클턴의 말들은 뉴질랜드의 말 전문가가 보고도 감탄할 우수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스코트의 말들은 그 결과가 말해 주듯 신통치가 않았었다.
기록에 의하면 스코트와 함께 남극 대륙에 상륙한 말은 열아홉 마리였다.
그에게 더 커다란 액운이 따랐던 것은 남 북극 탐험으로 잔뼈가 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같은 시기에 남극 탐험에 나서 썰매 개 100마리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상륙 한 것이다.
노련한 그는 말이나 모터 설상차 따위의 실험에 유혹을 받지 않고 철저히 에스키모의
방법을 답습했다.


복장부터가 에스키모들이 입는 아노락이라는 순록 가죽으로 만든 옷을 채택했다.
볼품은 없었지만 그 방한 효과가 수천년 동안 증명 된 것이었다.
더 해서 개들도 최상의 것들이었고 경비견처럼 명령일하에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최상의 훈련을 받은 것들이었다.
더해서 그들 대원들은 노르웨이인답게 전부 스키의 도사들이었다.
반면 스코트는 영국을 출발하고 나서 배에 타고 나서야 스키를 배우자고 지시할
정도였으니 결과가 뻔해 보였다.
스코트는 1910년 남극에 상륙하여 기지를 만들고 여러 관측과 준비 끝에
1911년 11월 1일 그는 다섯 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정복의 장정에 나섰다.
스코트는 그간 죽거나 병든 말을 남기고 남은 여덟 마리의 몽골말과 함께
수 십 마리의 개를 데리고 출발했었다.

그러나 액운은 그를 계속 붙어 따라 다녔다.
새클턴 때보다도 유독 더 심한 눈보라 폭풍이 출발 뒤 수시로 이들을
따라 붙었다.
여러 대원들이 걱정하던 말들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월 24일 말 한 마리가 죽었고 12월1일 또 한 마리가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상황은 12월 6일 몰아닥친 눈 폭풍은
가공할 정도였다.

닷새 뒤 엄청난 눈 폭풍이 멈추고 이들은 출발을 서둘렀다.
준비를 마치고 말 들을 썰매에 매이려고 할 때 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배를 땅에 붙이고 일어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두들겨 패고 달래고 해서 일으켜 새워봤자 단지 대 여섯 걸음을 걷고는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이들 말들은 혹심한 기후와 노동에 지칠대로 지쳤고 같이 데려 갔던 썰매 개들에게
공격당하여 심하게 부상을 입은 처지라 사실 동물이지만 움직이기기 지긋지긋 했거나
두려웠을 것이다.

더해서 말들의 수준이 새클턴의 말들과는 확실히 낮았다는 평가도 여기서
나타난다.
열 한 시간동안 말들과 씨름하던 스코트는 할 수없이 이들을 전부 도살하고
가죽을 벗긴 다음 고기는 올 때를 대비해서 얼음 속에 저장했다.
그 뒤 말이 끌던 썰매를 사람들이 끌면서 전진을 거듭하여 스코트는
드디어 1912년 1월 16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달도 전인 1911년 12월 14일
다녀간 아문센이 꽂아 놓은 노르웨이 국기와 스코트와 영국 왕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스코트가 그 곳에 도달 할 때까지 걸린 기간보다 23일간이나
짧은 단축된 기록이었다.
낙심한 스코트는 갖은 고통을 겪으며 귀환 길에 오른다.
식량 부족으로 빈사 상태였던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묻어 놓은
말고기로 부족한 영양을 보충했다.

말고기로 스코트 대원들의 생명은 얼마간 연장되었을 것이다.
이 것이 몽골말들이 스코트에게 베푼 최후의 봉사였다.
다시 계속한 귀환 길을 극심한 식량 부족과 눈 폭풍은 이들을 괴롭혔다
두 달 뒤 3월 29일 전신의 삼분지 이에 동상을 입은 스코트는
여러 명에게 유서를 남기고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 하던
동료 두 명과 함께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마흔 세 살 때였다.
그와 그의 동료 사체는 다음 해 가을에 영국 수색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몽골 말들이 남극에서 당한 수난을 생각 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스코트가 에스키모의 개와 같이 북극권의 해안에서 한 두 해 정도 실험 해보고
충분히 보완하여 출발했더라면 그리고 행운이 도와주었다면 새클턴과 같이
남극을 점령하여 인류 유일의 인마(人馬)협동 극지 전복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얼마 전 몽골의 지식인과 함께 몽골 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가 말해준 한 일화가 있었다
1970년도에 월남전이 치열했을 때 몽골은 북 베트남에 수백 필의 말을 지원해준 일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몇 년 뒤 고향으로 귀환하여 전 몽골인 들을 흥분 시켰었다.
그는 그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 여년 전 몽골 말 한 마리가 남극 문턱인 남위 84도까지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보니 몽골말의 팬으로서 어떤 한 작은 보람을 느낀다.